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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환경역사를 시도한다

이 시리즈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21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환경역사’environmental history의 관점에 크게 의존하려 한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라는 과정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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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역사적 연구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요즘 말하는 환경역사를 위한 큰 문을 열어준 것은 1994년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녹색세계사』A Green History of the World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이 분야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환경역사>라는 학문적 장르가 생겨나서 세계 각지에서 관련 학계들도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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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환경을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영성이든 지성이든, 심지어 감성조차도 그것이 인간을 통해 발현되는 방식, 혹은 그것을 인간이 인지하는 방식에는 환경이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아니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환경은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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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인류의 탄생도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 800만 년 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 중간쯤에서 지각변동으로 인해 큰 단층이 생기면서 이 지역을 남북으로 달려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를 나누는 지구대가 생겼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 서쪽의 대서양으로부터 오는 습기를 많이 머금은 공기가 지구대에 부딪치면서 동아프리카는 건조한 사바나 기후로 변해갔다.

2 아프리카 지구대

이에 따라 이전에 습도가 충분했을 때 형성되었던 열대림이 사라지면서, 그곳을 서식지로 하던 원숭이들이 멸종해갔다. 그 중 일부가 나무가 사라진 건조기후 생태계에 적응하여 두 발로 걸으면서 잡식성이 되었고, 나중에 인간의 조상이 되었다. 이 한 가지 예만 보아도, 환경은 그 안에 사는 생명체들의 삶에 엄청난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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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논하면서 ‘환경’의 변수를 강조하면, 과거(근대기 동안)에는 ‘결정론’determinism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곤 했다. 즉 환경이 인간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면, 거기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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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장은 환경의 변화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행동에 근본적이며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거기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개체의 운명이 달라지며, 그 결과의 종합으로서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운명도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환경은 인간에 의해 보호받거나 아니면 파괴당하는 수동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 삶의 모습을 규정하고 또 인간의 삶에 의해 변형되는 동등한 상호작용의 주체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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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이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왔던 환경담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담론들은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등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주로 조명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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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이 글에는 지금까지의 일반적 환경담론 뿐 아니라, 대부분의 환경역사와도 기본적으로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환경역사보다 시각을 한 수준 더 위로 올려, 지구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뿐 아니라, 그런 지구환경을 가능하게 한 우주의 환경변화까지 통합해서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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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환경담론에서도, 특히 ‘소빙하기’의 기후변화를 논하는 연구들에서는 지구 외의 우주적 실체인 태양의 영향력 같은 것을 부분적으로 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처음부터 지구의 환경 상태를 우주라는 더 큰 환경 속의 변화 과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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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일상의 인식 차원보다 한 수준 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영성’을 논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 지구환경 변화에 대한 연구들이 진전되면서, 그런 지구환경 변화를 초래한 우주 환경의 변화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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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해되었으면 우리는 이제, ‘영성이 21세기에 있어서 이 지구상 생명체인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탐구하기 위한 시간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것 같다.

1 쓰기에 앞서

이 카테고리를 통해 앞으로 쓰게 될 글은 <공동체영성모임>이라는 그룹에서 한 강연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21세기에 있어서 공동체와 영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해달라고 제안 받았을 때 나는 기쁘기도 했고 부담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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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공동체, 영성- 이 키워드들은 그동안 나의 관심사, 아니 내가 삶을 통해 배우게 된 것들을 가장 잘 요약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중한 나눔의 기회를 갖게 되어 기뻤고, 동시에 이 키워드에 담길 수 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을 단 몇 시간의 강의, 혹은 몇 페이지의 강연문에 어떻게 담을 것인가 곤혹스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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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회는 언제나 소중한 것이다. 그날 모임에서 21세기 영성의 비전을 함께 나누어주신 참가자들께 감사드린다. 그로 인해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이 접한 사람들, 또 많이 접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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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을 주제로 얘기할 때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다. 적어도 지난 2~300년간의 근대기 동안, ‘영성’은 진지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으며, 일상의 대화 주제로서도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고 본다. 따라서 자칫하면 영성 담론은 ‘말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의 대화’가 될 수도 있고, 참여자의 폭이 넓어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에게 생뚱맞은 얘기로 들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특히 역점을 두었던 부분에 대해 미리 얘기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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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영성’에 대해 얘기할 때 필요한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적 탐구의 방법론을 좀 더 융통성 있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근대기 동안 우리는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추론’만이 우리를 진리에 데려다준다는 믿음을 확고히 해왔다. 하지만 영성은 이성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정신 작용이므로, 과학적인 추론만으로는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한계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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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권위의 백과사전인 엔싸이클로피디아 브리태니커Encyclopedia Britannica에 의하면 지식은 그것을 얻는 방식에 따라 크게 3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경험, 즉 관찰에 의하여 얻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이성, 즉 추론에 의해서 얻는 것이고, 세 번째가 직관, 즉 영감에 의해서 얻는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은 이 세 가지 방법을 모두 탄력적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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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글쓰기라는 것이다. ‘영성’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21세기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특징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이전 세기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이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역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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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글에서는 ‘환경역사’의 방법론을 따를 것인데, 여기 대해선 다음 포스팅에서 좀 더 자세히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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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나는 ‘영성’이라는, 보통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영역도, 우리의 물질적 존재 기반과 깊이 관련된다고 믿는다. 이 글에서도 그런 관련성의 상호작용을 조명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글도, 100% 역사적인 글도 아니다. 맥락의 필요에 따라 자연과학·역사·사회과학적 성과들이 통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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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의 입장은 좋게 말하면 전일주의holism, 혹은 다학문적 접근interdisciplinary approach, 심지어 통섭consilience과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을 거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이렇게 해야 세상 일이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