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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생각하지 않아도 존재한다

뇌과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미국에서 학문적으로도 인정을 받으면서 또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뇌신경학자로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박사를 꼽을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송과체 이야기와 관련된 것이지만, 아직 송과체에까지 연결되지는 않았고, 총사령관인 송과체가 판단을 하면 그 반응을 지시해서 보내는 사단 본부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전두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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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자극, 즉 신호가 오면, 우리 몸 안에서는 그 신호를 해석하고 거기 대해 판단을 한 후 반응 방식이 결정되어 실행된다. 예를 들면 대단히 위협적인 자극이라고 판단하면 바로 도망치거나 경계태세로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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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우리 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17세기의 사상가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우리의 뇌 안에서 이성이 모든 경험과 지식을 종합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릴 것”라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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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로부터 약 350년 후 다마지오 박사의 의견은 다르다. 그의 주장은 인간이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이 가장 나은지 다 “생각하려면”, 즉 무수한 직접·간접 경험에서 오는 정보를 다 처리해서 지적으로 종합하려면, 너무나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들기 때문에, 대체로 초고속 지름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지름길은 이성을 통과하지 않고 호·불호를 판단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정서’와 연관되어 있으며, 종래에 ‘본능’이라고 말해지던 부분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런 다마지오의 설명을 ‘소마틱(신체적) 마커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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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개에게 물린 적이 있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좀 떨어진 곳에 큰 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저 개를 피해서 지금 가던 길을 돌아가면 나에게 얼마나 손해가 생길 것이며, 저 개가 나를 물 확률이 얼마인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피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그 개를 본 순간 우리 의식이 미처 작동하기도 전에, 두뇌에서 소마틱 마커, 즉 몸에 신호를 보내는 물질을 만들어 ‘공포’라는 정서를 일으키면서 온 몸의 근육 움직임을 바꾸어놓기 때문이라고 다마지오는 설명한다.

9 소마틱 마커
소마틱 마커는 두뇌의 복내측시상하핵 전전두엽 피질(VMPFC)이라는 곳에서 생겨서 활동하는데, 위 그림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이곳은 원시뇌라고 하여, 인간이 고등동물로 진화하기 이전에 원시적인 생물체였을 때부터 존재했던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아주 원시적인 생명체에서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명체가 이런 판단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하는 과정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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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각하는 것이 환경에 적응하는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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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틱 마커 가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무수한 자극과 그것이 보내는 신호가 몸으로 전달되어 인간의 몸 전체가 그에 대한 반응을 하게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가장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론 중 하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대해 과학적으로 규명한 보기 드문 연구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송과체의 기능에 대해서도 이렇게 명쾌한 과학적 규명이 내려지길 기대한다.